오늘은 케이사르 씨의 저서 『눈먼 자 앞에서』를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이 유대인 지혜 모음집은 옳고 그름에 대한 인간의 내적 지식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순진한 친구인 동물은 태고로부터 신성한 율법 즉 계명에 의해 보호받았습니다. 동물에 대해 『눈먼 자』에게 빛을 비추는 것이 『미츠바』(계명)이며 『다른 이들에게 심각한 위반을 경고합니다. 신은 순결한 이에게 선을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랍비 아브라함 사하: 『완전하고 총체적 관점으로 볼 때 모든 창조물에 선하신 신의 친절함 - 어미 동물의 가슴에서 나오는 젖의 목적은 새끼에게 먹이기 위함이며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그것은 사랑하는 자녀인 어린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키우기 위함이며 사랑하는 어미의 젖으로 자라나는 즐거움을 가져야 합니다』
동물도 고통을 경험하는가?
마이모니데스는 말합니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동물이 느끼는 고통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식을 향한 어미의 사랑과 간절함이 지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듯 대부분의 생물의 타고난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나흐마니데스는 말합니다. 『동물들도 염려하며 아이를 향한 인간의 염려와 동물의 염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자궁에서부터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지능이나 언어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에서 발견되는 의식의 작용입니다』
마이모니데스는 계명이 직설적이라고 이해합니다. 누구도 동물에게 고통을 가해선 안 됩니다. 나흐마니데스는 계명의 목적은 우리를 곧은 길로 나아가게 하고 인간에게 잔인함을 뿌리 뽑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랍비 삼손 라파엘 허쉬가 말하길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베이고, 밀리고, 얻어맞고, 과로하고, 두렵고 당황하며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고 감지합니다』 기억력의 축복을 받은 랍비들이 어떻게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지 보세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현명한 자는 선을 듣고 따릅니다. 랍비 유다 하카시드는 닭을 괴롭히지 않을 만큼 주의 깊지 못할까 염려하여 닭을 기른 적이 없었지요. 그는 새를 키우는 것을 권하지 않았는데 그러면 새를 먹여야 할 책임이 생기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와 벌이 매우 크다고 말했습니다』
다음은 거룩한 조하르의 말씀입니다. 새가 와서 토라를 공부하는 탄 나임(현자 랍비들)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었지만 그들은 이 그늘을 누리고 싶어 하지 않았고 랍비 핀카스 벤 야이어는 그들 위에 그늘을 만드는 새들에게 그것은 큰 고통이니 『나는 동물의 노고에서 이익을 얻고 싶지 않다』고 말하여 이렇게 기록됩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에 자비로웠습니다』
위의 일화에서 동물의 노고는 스스로 시작했으며 그들의 의지로 했고 인간의 강요는 없었습니다. 랍비 핀카스 벤 야이어는 여전히 이런 노고를 누리길 원치 않았습니다. 동물에게 주는 고통과 아픔에 대한 감수성은 전 세대에 걸쳐 이스라엘 위인들의 영혼에 존재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 랍비 삼손 라파엘 허쉬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기억하세요! 신의 토라는 만물을 사랑하며 당신이 동물에게 불필요한 아픔과 고통을 주는 것을 그만둘 때뿐 아니라 우연히 고통과 괴로움에 빠진 동물을 보고 그 고통에서 당신 잘못은 없고 아무 상관이 없을지라도 동물을 구하고 동물의 고통과 괴로움을 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신은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육식에 대한 토라의 태도
하라브 이츠카크 하반스트레이트: 『전통과 윤리, 종교와 지혜에 따르면 육식이 부적절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장기를 분석하면 인간에게 육식이 맞지 않음이 입증됐기에 그것은 부자연스럽지요. 사람은 천국의 이슬과 대지의 기름과 땅의 곡물과 초목과 나무 열매를 먹고 살도록 창조됐고 사람의 장기는 우리가 육식동물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또한 인간은 육식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소, 양, 염소, 닭 같은 생명체를 볼 때 그들을 먹고 싶은 내면의 충동이나 욕망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날고기는 우리 안에 어떤 욕망이나 식욕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되레 그것은 역겨우며 보기에도 혐오스럽지요. 하지만 야채나 나무의 과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자연적으로 다르게 반응합니다.
그들은 강하고 정상적인 감정을 일으키며 우리를 사랑스럽게 부릅니다. 『바라보기에 경이롭고 먹기에 좋았노라』 그들 가운데에서 그들이 창조된 대로 신선한 것을 먹고 과일을 맛보고 싶다는 큰 욕망이 깨어납니다. 이것이 사람을 위한 타고난 양식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아닐까요? 육식은 인간에게 부자연스러우므로 육식은 인간을 해치고 생명을 단축합니다. 사람이 자연을 거스르면 자연이 그들을 허용하고 나날을 채워주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자연은 자신을 거스르는 자를 용납하지 않으니까요.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하며 자연도 원하는 대로 하면 그들 사이에 조용하지만 심각한 전쟁이 일어나고 그 정도가 넘치면 자연은 그들을 뱉어냅니다. 토라의 말씀처럼 『나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데려왔다』
인간은 단지 죽기 위해 창조되지 않았으며, 그의 문제는 오직 폭식과 지나친 탐닉의 결과입니다. 대부분의 의학 전문가는 책에서 모든 질병이 육식 기반의 식단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연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약은 여러 식물로 만듭니다. 병든 자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서 회복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탈무드의 금언처럼 『렌즈콩을 주기적으로 섭취하는 사람은 가정에서 질병을 예방하며 겨자는 가정에서 불편함을 예방한다』 그들은 말합니다. 사람이 정해진 것을 먹는다면 소화가 힘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식을 한다면 그 조직이 육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채식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