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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말씀

여섯 엔네아데스: 참된 행복에 대하여 플로티노스(채식인), 2부 중 1부

2022-06-17
진행 언어:English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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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노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고대 철학자에 속합니다. 그의 철학에는‍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유일자, 지성 그리고‍ 영혼입니다.

19세기 역사가들은‍ 신플라톤학파란 말을 만들어 플로티노스의‍ 철학을 표현했지요. 그의 형이상학적 글은‍ 이슬람교와 유대교,‍ 기독교와 그노시스파‍ 형이상학자에게‍ 수백 년간 영감을 주었죠.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행복이란 주제에서‍ 서양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는 의식 안에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관념을 처음 소개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의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은 모두‍ 가장 높은 도덕성과‍ 영적 기준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싫어했고‍ 육식을 반대했으며 동물성 물질이 포함된‍ 약물을 거부했습니다.

플로티노스의 마지막 말입니다:

『자신 안의‍ 신성을 모두의 신성으로‍ 끌어올리도록 노력하라』‍

그는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나기 오래전에 가장 가까운 제자인‍ 포르피리오스와‍ 아멜리우스에게 자신의‍ 저술을 수집하여 수정, 편집하는 광범위한 작업을 맡겼습니다.

그리하여 플로티노스의 소중한 통찰을 수많은 세대에 전하는 『여섯‍ 엔네아데스』가 나왔지요. 그것은 길이가 다양한 54개 논문이 9편씩 6그룹으로 3권을 구성합니다.

엔네아데스는 윤리적인‍ 주제를 강조하는 제1 엔네아드로 시작해 정교한 단계로 분류됩니다. 현명한 시청자 여러분께‍ 오늘은 플로티노스‍ (채식인)의 저서‍ 여섯 엔네아데스에서‍ 제1 엔네아드, 4편: 진정한 행복의‍ 아름다운 보석 같은 글을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제1 엔네아드, 4편: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1장‍

『우리는 복지나 번영과‍ 진정한 행복을 하나이자‍ 같은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운명이‍ 아무 방해 없이‍ 번성하도록 허락하는 한‍, 그들 중 누구에게도‍ 행복을 거부할 이유는‍ 분명히 없습니다.

우리가 복지를‍ 쾌적한 삶의 조건 또는 적절한 사명의‍ 완수로 여기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것은 그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확실히 그들은‍ 본성에 있는‍ 어떤 기능을 편안하게 여기며‍ 활동할 수 있습니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생명체를 예로 들어 봅시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도‍ 잘 살아가고‍ 그들의 본성처럼‍ 노래도 부르며 그래서 하루가‍ 즐겁습니다.

만약 우리가 행복을‍ 타고난 성향이 추구하는‍ 어떤 궁극적인 조건으로 설정한다면, 동물이‍ 이 궁극적인 것을 성취하는‍ 순간부터 이 머리도 역시 허용해야 합니다. 그들 안의 본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의 중요한 과정을 완수하고 멈춥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인간에게 동물이 대단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물의 삶이 선하지 않다고 하면 분명히 타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식물의 경우 그들이 반드시 다른 형태의‍ 생명과 일치해야 한다고 인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감정이 없기 때문이죠.

사실 인간은 그 식물에‍ 가능한 번성함을 공표하고‍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가졌고‍ 생명엔 선과 악이 있습니다. 식물은 번성하거나 시들고‍ 열매를 맺거나 맺지 못하죠.

아닙니다: 만약 쾌락이 용어고‍ 여기 생명의 선함이 있다면,‍ 생명체의 어떤 질서에서‍ 생명의 선함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내면의 평화라는 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선함이‍ 본성의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1 엔네아드, 4편: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2장

『땅에 있는 식물은‍ 감각이 없기에 행복한 삶이 아니라고 하는 자는 모든 생명체의 행복한 삶‍ 또한 부정합니다. 감각은 상태에 대한‍ 인식만을 의미할 수 있고‍ 행복의 상태는‍ 인식과는 별개로‍ 그 자체로 선해야 합니다.

자연 계획의 일부가 되는 것은 그것을 알든 모르든 좋은 것입니다. 적절한 상태에는 선이 있습니다.

설령 그 적합함이나 바람직한 품성을‍ 인식하지 못해도 그 자체로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함은 존재하기에‍ 거기에 있습니다. 존재하는 선에는 더는 수고하지 않아도 행복이 있습니다

제1 엔네아드, 4편: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3장‍

『만약 우리가 생명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행복할 것이고‍ 모든 생명체가 천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공통된 선물을‍ 가진 존재는 실제로‍ 행복할 것입니다.

우린 그것을 비합리적이라 부정할 수 없으며, 동시에‍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 있지요.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행복을 타고난다면, 행복의 원인이‍ 언제나 뿌리내릴 수 있는‍ 공통된 바탕은 바로 생명일 것입니다.

하나의 원칙에서 모든 생명체가 나오지만‍ 다른 수준의 생명을‍ 소유하였기에 이 원칙은 먼저 생명이자 가장 완전한 존재라고 간략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제1 엔네아드, 4편: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4장‍

『만약 완전한 생명을 인간이 잡을 수 있다면,‍ 그것을 얻은 인간은‍ 행복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은‍ 신들에게 넘겨야 합니다. 완전한 삶은 신들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도 행복을‍ 누리고 있기에 우리는 이 완전한 삶이‍ 무엇인지 고찰해야 합니다.

어떤 이에겐 오히려‍ 그것이 존재 전체의 단순한 일부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즉 그것을 잠재적으로‍ 가진 이가 있고 진정한 행복을 이미 소유한 이도 있는데,‍ 이들은 완전함을‍ 이루었고 실제로‍ 행복과 일체화한 상태로 넘어갑니다.

다른 모든 것은 이제‍ 인간의 껍질에 불과하며, 그것을 구하지 않으며 의지를 가진 어떤 행동도 그에게 적합하지 않기에‍ 그의 일부라고 칭할 수 없지요. 이런 상태의 인간에게‍ 선이란 무엇일까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입니다. 그의 존재와 가진 것의‍ 창조자이자 원칙은‍ 신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선이지만,‍ 인간의 내면에서 이 다른 방식을 따라‍ 스스로 드러냅니다. 이 상태를 이룬 징후는 사람이 더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무엇을‍ 찾는 걸까요?

물론 무가치한 것은‍ 분명히 아니며 그가 지닌 최고의 것은‍ 항상 내면에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필요한 모든 걸 가졌지요. 일단 현자가 되면‍ 행복의 수단, 선으로 가는 길은 내면에 있고 외면에 있는 것은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이것에 더해 원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아니라 부수적이거나 자신이 묶인 육체를 위한 것입니다. 생명을 가졌기에‍ 이런 수준의 진정한 인간에겐 필요하진 않지만 생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합니다.

자신이 이 모든 것 위에 자리한 것을 알며‍ 저급한 필요에 주는 것은 그의 진정한 생명을 약화하지 않기 위해서죠. 불운은 그의 행복을‍ 흔들지 못합니다. 삶은 언제나 안정됩니다.

가령 가족이나 친구에게‍ 죽음이 닥친다면‍; 그는 희생자로서‍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현자 가운데 있다면‍ 그들 역시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가족과 친지를 빼앗아 가서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에게도‍ 진정한 사람에게도 아닌‍ 지고한 신과 분리된 인간 안의 것과 고통을‍ 나누지 않는 저급한 인간 부분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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