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기원전 470년경 태어났지요. 그와 그의 인생 철학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그의 사후에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들 제자는 여러 권의 책 속에 그들 스승을 묘사했는데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지상에서 개개인의 주목적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심으로 소크라테스는 채식을 따르고 장려했습니다. 플라톤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적 저술 중 하나는 『향연』입니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와 다른 사람들이 주로 사랑과 사랑이 나타나는 다양한 방식, 영적 진보를 얻기 위한 초월적 길에 대한 소중한 대화를 보내드립니다.
이제 플라톤의 유명한 저서 『향연』을 발췌해서 읽겠습니다. 이 책은 연회에 참석한 저명인사를 묘사하며 그곳에서 그들은 철학적인 생각을 주고받습니다. 한 대화에서 소크라테스가 예언자이자 여사제인 디오티마와 나눈 사랑의 개념과 본질에 관한 대화를 회고합니다. 이 디오티마와 대화는 사랑을 『위대한 영』으로 부르며 플라토닉러브란 개념의 기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묻기를 『그럼 에로스는 무언가요? 인간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무언가요?』 『앞의 경우에서처럼 그는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요?』 『위대한 신령(다이몬)으로 모든 신령처럼 그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간자입니다』 내가 말하길 『그러면 그의 힘은 무엇인가요?』 그녀가 대답하기를 『그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해석하고 사람의 기도를 신들에게 가져가고 사람에게 신의 명령과 대답을 옮겨줍니다. 그들 양자의 가운데 있으며 그들 사이를 메워 주고 그래서 그 전체가 자신과 이어지게 합니다. 온갖 예언자와 사제들의 기술도 그리고 온갖 예언, 주술도 이것을 통해 길을 찾습니다.
신은 인간과 직접 섞이는 게 아니라, 바로 사랑을 통해 깨어 있건 잠들어 있건 간에 인간들과 교류하고 대화합니다. 이런 일들에 관해 지혜로운 자는 신령합니다. 이제 이 신령들, 즉 매개자의 힘은 많고 다양한데 그중 하나가 에로스입니다. 상황의 참모습은 이것입니다. 신은 지혜를 좇는 철학자나 탐구자가 아닌데 이미 현명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찾는 어떤 인간도 지혜롭지 않습니다. 또한 무지한 자는 지혜를 찾지 않습니다. 무지가 다루기 어려운 것은 선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지만 자신에게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족한 줄 모르면 욕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지요. 『그러면 디오티마여, 누가 지혜를 사랑하나요? 만일 그들이 현명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면요』 그녀가 대답하기를 『어린아이가 그 질문에 대답할 것입니다. 아이는 지혜와 무지의 가운데 있습니다. 에로스도 그들 중 하나죠. 지혜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에로스는 아름다움에서 나왔기에 에로스도 역시 철학자이며 지혜를 사랑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현명한 자와 무지한 자의 중간자입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할 때 무엇을 원할까요?』 디오티마가 물었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답하기를 『아름다움이 그의 것이죠』 그녀가 말하기를 『여전히 그 대답은 더 많은 질문을 시사합니다. 아름다움을 소유하면 무엇을 얻나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묻는 것인가요? 답이 준비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움의 자리에 선이라는 말을 넣고 한 번 더 질문을 반복하겠습니다. 만일 선을 사랑한다면 무엇을 사랑할까요?』 내가 답했습니다. 『선을 소유하는 것이죠』 『선을 소유하면 무엇을 얻을까요?』 내가 답하길 『행복이죠. 이 질문의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녀가 말하길 『그래요, 선한 것을 얻으면 행복해집니다. 인간이 왜 행복을 원하는지 물을 필요는 없지요. 그게 최종적인 답이니까요』 내가 말하길 『맞습니다』 『그러면 이 바람과 욕망은 모두에게 공통된 걸까요? 모든 사람이 항상 자신의 선을 원하나요? 아니면 일부만 원하나요? 어떻게 보십니까?』 내가 답하길 『모두입니다. 모두가 그걸 바라죠』 그녀가 말하길 『그럼 왜 모두가 다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어떤 자들만 그렇게 말하나요? 그런데 당신은 모든 사람이 항상 같은 것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군요』 내가 말하길 『저도 왜 그런지 궁금합니다』 그녀가 답하길 『이상할 게 없습니다. 사랑의 한 부분이 분리되어 그 전체의 이름을 받지만 다른 부분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를 들어달라고 하자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시가 있는데, 알다시피 그것은 복잡하고 다면적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모든 창작이나 문장은 시이거나 작품입니다. 모든 예술의 과정은 창조적이며 모든 예술의 거장은 모두 시인이나 창작자죠』 『정확합니다』 그녀가 말하길 『알다시피 여전히 그들을 시인으로 부르지 않고 다른 이름이 있지요. 나머지 부분에서 분리된 예술의 한 부분만이 시인입니다. 즉 음악과 운율(시의 리듬)이 있어야 시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를 짓는 사람만 시인으로 부릅니다』 내가 말하길 『맞아요』
『사랑도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선과 행복에 대한 욕망은 단지 사랑의 크고 미묘한 힘입니다. 어떤 다른 길을 통해 그에게 끌렸다면 돈벌이나 체력단련, 철학을 통해서라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전체의 이름을 오직 한가지 방식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그들만 사랑한다고 또는 사랑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내가 답하길 『맞습니다』 그녀는 말하길 『사람이 선을 사랑함은 진리입니다』 내가 말하길 『맞아요. 거기에다가 선을 소유하길 좋아함을 더해야 하겠지요?』 『네 그걸 더해야 해요』 『단지 소유만이 아니라 선을 영원히 소유하길 원하는 거죠?』 『그것도 더해야 합니다』 그녀가 말하길 『그러면 일반적으로 사랑을 선의 영원한 소유로 묘사해야 하겠지요?』 『가장 적합합니다』
그녀가 다양한 시기에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이 모든 걸 가르쳐 주었죠.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소크라테스여, 무엇이 사랑의 원인이고 수반되는 욕망입니까? 모든 동물, 새와 짐승이 출산을 원할 때 고통을 겪는 걸 당신은 봅니다. 그들이 사랑에 빠질 때 결합의 욕망이 시작됩니다. 거기에서 자식을 돌보는 것이 더해지고 가장 약한 존재를 위해 가장 강한 존재, 심지어 극도로 강한 존재와 싸우려 하며 그들을 위해 죽고 자신은 굶주림으로 고통받거나 어린 자식을 지키려고 모든 걸 견딥니다. 사람은 이성에 의해 행동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동물에게 열정적 감정이 있을까요? 이유를 말할 수 있나요?』
나는 다시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녀가 내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사랑의 기술에서 이것도 모르면서 거장이 되기를 고대한 적이 있나요?』 『디오티마여, 나는 이미 당신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무지가 이유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온 이유는 선생이 필요함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의 원인과 사랑의 다른 신비를 말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