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냐나와 윈냐나 “즈냐나는 세상 사물과 자신을 동일하게 보지 않고 『이것이 아니다』라고 구별하는 것이다. 그래야 브라만을 깨닫는다. 이는 계단을 하나씩 지나가서 집의 지붕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브라만과 함께 더 밀접하게 얻는 윈냐나는 더 많은 것을 깨닫는다. 그는 계단이 지붕과 같은 재료인 벽돌, 석회, 흙으로 만들어졌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아니며, 이것도 아니다』라고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직관적으로 깨달은 후에 브라만이 우주와 그 모든 생명체가 된 것을 발견한다.
윈냐나가 보는 실상은 속성이 없는 니르구나이며, 속성이 있는 사구나이기도 하다. 사람은 지붕 위에서 오래 살 수 없다. 그는 다시 내려온다. 삼매에서 브라만을 깨달은 사람도 또한 내려와서 브라만이 우주와 그 모든 생명체가 된 것을 발견한다. 음계에는 사, 레, 가, 마, 파, 다, 니의 음조가 있지만 목소리로 오랫동안 『니』소리만 낼 수는 없다. 자아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삼매에서 깨어난 사람은 브라만이 자아와 우주와 모든 생명체가 된 것을 인식한다. 이것은 윈냐나로 알려져 있다”
사랑의 길은 쉽다 ”지식의 길이 진리로 이어지듯, 지식과 사랑이 결합한 길도 그러하다. 사랑의 길도 이 목표로 이어진다. 사랑의 길은 지식의 길만큼 진리이다. 모든 길은 결국 같은 진리로 이어진다. 그러나 신께서 우리 안에 자아의 느낌을 유지하게 하는 한 사랑의 길을 따르기가 더 쉽다. 비즈냐나는 브라만이 수미산처럼 고정되어 움직임이 없음을 본다. 이 우주는 세 가지 성질인 진리, 움직임, 혼돈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브라만 안에 있다. 브라만은 집착하지 않는다”
신의 신통력 “비즈냐나는 브라만을 더 나아가 인격신 바가반이라고 본다. 세 가지 성질을 초월한 사람이 바가반이며, 그는 여섯 신통이 있다. 생명체, 우주, 마음, 지성, 사랑, 금욕, 지식, 이 모든 것이 그의 힘의 발현이다. 귀족이 집도 재산도 없거나 그것들을 팔 수밖에 없다면, 사람들은 그를 더는 귀족으로 부르지 않는다. 신은 여섯 신통을 지니고 있다. 그분이 아니라면 누가 그분께 복종하겠는가?”
신의 힘에서 나온 다양한 발현 “이 우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라! 얼마나 다양한가! 해, 달, 별, 그리고 온갖 종류의 생명체가 있다! 크고 작고, 좋고 나쁘고, 강하고 약하고, 힘이 더 세고 힘이 더 약한 것도 있다. 비드야사가르: 신은 어떤 이에겐 더 많고 다른 이에겐 더 적은 힘을 주었습니까?
스승: 신은 편재하는 영으로 모든 존재, 심지어 개미에게도 존재한다. 그러나 신의 권능의 표현은 존재마다 다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어떤 사람은 열 명과 싸우고, 다른 사람은 한 명도 맞서지 못할까? 그리고 왜 모든 사람이 당신을 존경하는가? 당신에게 뿔이 자라는가? 당신은 더 많은 자비심과 배움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존경과 경의를 표하려고 온다. 내 말에 동의하는가? 배움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존경과 경의를 표하려고 온다. 내 말에 동의하는가? 비드야사가르가 웃었다.
스승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그냥 학문에는 아무것도 없다. 공부의 목적은 신을 알고 깨닫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한 성자에게 책이 있었다. 무슨 내용이냐고 묻자 그는 그것을 열어 모든 페이지에 『옴 라마』라는 말만 있음을 보여주었다. 기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말을 열 번 반복하면 이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타기』로 바뀌는데, 이는 신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자를 뜻한다.
다음은 기타의 교훈이다: 『오 인간이여, 모든 것을 버리고 신만을 구하라』 승려이든 재가자이든 마음에서 모든 집착을 털어내야 한다. 차이탄야데바가 인도 남부로 순례를 떠났다. 어느 날 그는 기타를 읽는 남자를 보았다. 멀찍이 앉아 있던 다른 남자가 귀를 기울이며 울고 있었다.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했다. 차이탄야데바가 물었다. 『모든 걸 이해합니까?』
남자가 답했다. 『아니오, 저는 책의 한 단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웁니까?』 차이탄야가 물었다. 헌신자는 이렇게 말했다. 『앞에 아르주나의 전차와 주 크리슈나께서 계시고, 아르주나가 그 앞에 앉아 말하는 것을 보고 웁니다』 왜 비즈냐나는 신을 향한 사랑을 유지하는가? 답은 『나라는 의식』이 지속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삼매 상태에서 확실히 사라지지만 다시 돌아온다. 일반인의 경우 『나』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보리수를 베어도 다음 날 새싹이 돋는다”
자아는 고통을 낳는다 ”지식을 성취한 후에도 이 『나라는 의식』이 나오지만,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 주여, 저는 종이며 당신은 주인이십니다. 저는 어린아이이며 당신은 어머니입니다. 라마 왕이 하누만에게 『나를 어떻게 보는가?』 묻자 하누만이 대답했다. 『오 라마여, 「나」라는 느낌이 있는 한 당신은 전체이고 저는 부분이며, 당신이 주인이고 저는 종인 것을 압니다. 하지만 오 라마여, 제가 진리의 지식을 얻을 때 당신이 나이고 내가 당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적절하며, 이 『나』는 존속해야 하니 그 악당을 신의 종이 되게 하라”
『나』와 『내 것』의 악함 『나』와 『내 것』 - 이들은 무지를 구성한다. 『내 집』 『내 재산』 『내 학문』 『내 소유물』 그런 것을 말하도록 부추기는 태도는 무지에서 나온다. 반면에 지식에서 오는 태도는 다음과 같다. 『오 신이시여, 당신은 주인이시며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집, 가족, 아이, 수행원, 친구도 당신의 것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죽음을 기억해야 하며, 어떤 것도 죽음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는 장사하러 시골에서 콜카타로 오는 사람처럼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방문객이 부자의 정원에 간다면 관리자가 그에게 『여기가 우리 정원이죠』 『여긴 우리 연못입니다』 등등을 말한다. 그러나 관리자가 어떤 죄로 해고된다면 망고나무 상자조차 가져갈 수 없다. 그는 그것을 문지기에게 몰래 보낸다. 신은 두 가지 경우 웃는다. 그는 환자의 어머니에게 의사가 『두려워 마세요. 아들을 치료할 겁니다』라고 말할 때 웃는다.
신은 웃으며 말한다. 『내가 그의 목숨을 가져갈 것인데 이 사람이 구하겠다고 하네』 의사는 신이 주인임을 잊고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신은 두 형제가 줄로 땅을 나누며, 서로 『이쪽은 내 땅이고 저쪽은 네 땅이다』라고 말할 때 다시 웃는다. 그는 웃으며 말한다. 『온 우주가 나의 소유인데, 그들은 이곳과 저곳이 자기 거라고 말한다』 사람이 논리를 통해 신을 알 수 있는가? 신의 종이 되어 자신을 신께 맡기고, 그리고 신께 기도하라”